문재인과 김원웅.


보수 정치 계열을 친일파라고 주장했던 김원웅 광복회장은 17일 자신이 과거 공화당, 민정당, 한나라당 등에 몸담았던 전력에 대해선 “생계 문제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김 회장은 이날 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비록 생계이긴 하지만 거기에 몸담았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친일 청산도 원죄가 있기 때문에 외치는 것”이라고 변명했다.

김 회장의 광복절 기념사가 논란이 되면서 정치권에선 ‘박정희 공화당→전두환 민정당→이회창 한나라당→친노(親盧)’로 갈아탄 정치 이력이 도마에 올랐다. 독립운동가 집안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72년 박정희 정권 민주공화당 사무처 공채에 지원해 당료(黨僚)로 근무했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고 민주정의당이 창당되자 민정당으로 옮겨 요직에서 일했다.

그러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에는 탈당해 이른바 '꼬마 민주당'으로 옮겨, 이 당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다. 하지만 4년 뒤 낙선하자 1997년 돌연 한나라당에 합류해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이 됐다. 그러다 다시 탈당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도왔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됐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을 지냈다.

이랬던 김 회장이 광복절 기념사에서 보수 정치권을 “친일 반민족 세력”이라고 규정하자, 정치권에선 “자신의 과거 행적부터 돌아보라”는 말이 나왔다. 김 회장은 이에 대해 “그 문제에 대해서 저는 솔직히 다 사실”이라며 “제가 생계를 꾸리고 젊은 시절에 가정을 꾸려나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록 생계이긴 하지만 거기에 몸담아서 제가 몸담았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김 회장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박정희 정권) 공화당에 사무직원 공개채용 시험이 있기에 거기에 응시해서 제가 사무처 직원으로 들어갔다”며 “그런데 그 공화당이 당이 또 바뀌니까 전두환이 집권하니까 그대로 민정당이 됐다”고 했다.

1990년 3당 합당 후 ‘꼬마 민주당’으로 옮긴 것에 대해선 “그전에는 (당료로 일하면서) 사무실 남 도와주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윗사람들 약속 잡으라고 하면 약속 잡고 행사하는 데에 물품 준비하라고 하면 물품 준비하고 이런 것을 하는 거였다”며 “꼬마 민주당에서는 제 이름으로 제가 정치를 했고 그 이후에는 한 번도 제가 제 원칙과 노선을 지키기 위해 철저히 했다”고 했다. 보수 정권에선 ‘직원’으로 일했을 뿐이고, 진보 정권에 들어와선 자기 소신을 갖고 정치를 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김 회장은 “저는 과거 지울 생각이 없다. 그 반성으로 원죄가 있기 때문에 더 충실하게 지난 삼십몇 년 동안 살아왔다”며 “이번에 제가 친일 청산을 외치는 것도 그런 원죄가 있기 때문에 원칙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변명했다.

김 회장은 이날도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백선엽 장군, 안익태 선생에 대한 비난을 이어갔다. 그는 안익태 선생의 친일 행적과 표절 의혹 때문에 애국가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안익태가) 베를린에 오래 근무하면서 일본의 베를린 첩보 담당 등 여러가지 친일 행적이 명료하다” “국가의 가사가 불가리아 민요의 60% 베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고(故) 백선엽 장군의 6·25 전쟁 공적에 대해선 “과도하게 미화가 됐다”며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최후 방어선인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 장군의 전공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김 회장은 “6·25가 난 날과 그 다음 날 백 장군이 이끌던 육군 제1사단이 안 나타났다”며 “그래서 1사단에 있던 장교나 군인들이 장군이 없어 그 다음 날 할 수 없이 도피를 했다. 그것만 가지고도 사형감”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해방 이후에 미국에 빌붙어서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 국가 이익을 챙긴 사람이지 건국 대통령, 이런 말을 붙이기에는 부끄러운 분”이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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